안중근 의사 명언 유묵 18점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忍耐(인내)

참고 견딘다는 안의사 평생의 좌우명


天堂之福永遠之樂(천당지복 영원지락)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황금백만량불여일교자)

황금 백만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貧而無諂富而無驕(빈이무첨,부이무교)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다.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부수사심여철, 의사임위기사운)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같도다.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치오의오식자부족여의)

궂은 옷,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孤莫孤於自恃(고막고어자시)

스스로 잘난체 하는것보다 더 외로운것은 없다.


博學於文約之以禮(박학어문약지이례)

글공부를 널리 하고 예법으로 몸단속하라.


人無遠慮難成大業(인무원여난성대업)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나라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
눈보라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안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백일막허도 청춘부재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
(년연세세화상사 세세연년인부동)
해마다 계절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고 변하네


自愛寶(자애보)
스스로를 보배처럼 사랑하라.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국가와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見利思義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사명)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百忍堂中有泰和(백인당중유태화)
백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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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3-28 09:41, "김제철"님이 쓰신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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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History & Lesson:


2010년 3월 26일 오늘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타계 100 주년이 되는 날로 한국에서는 안 의사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는 행사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고 언론도 크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외국에서 오래 사느라 별로 기억하거나 접할 기회가 없었던 안중근 의사의 활동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879년(고종 16)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의 아들로 태어난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말을 잘 탔을 뿐만 아니라 사냥을 할 때 총을 잘 쏘아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어 나라의 주권을 빼앗자 그는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고, 자신의 석탄 상점을 팔아 1906년 남포에 삼포 학교와 돈의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내는 데 힘썼다. 이듬해 일본이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하자 안중근은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1907년 이범윤 등과 함께 대한의군을 조직하고 참모 중장을 맡아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09년 러시아로 간 안중근은 김기룡 등 12명과 함께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없애기로 손가락을 잘라 피로 맹세했다. 또한 3년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죽음으로 국민들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했다.


2009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회담을 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아 낸 안중근은 이토를 없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단지회 회원들과 암살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하기로 한 10월 26일, 안중근은 일본인 기자로 변장하고 하얼빈 역에 숨어 들어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려 환영객들을 향해 나가는 순간 안중근은 3발의 권총을 쏘았다. 2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왼쪽 가슴에, 1발은 심장에 명중시켰다. 이어 안중근은 태극기를 꺼내 우렁찬 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안중근은 그 뒤 경찰 심문 과정에서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 중장이며 나이가 31세임을 밝히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의 독립 주권을 빼앗아간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를 해치는 자이다. 그러므로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것이지, 내 개인의 생각으로 그를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의연하게 밝혔다. 또한 여섯 차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일반 살인범으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 포로로 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재판장에서 꿋꿋한 자세로 당당하고 논리 있게 답변하는 안중근을 보고 일본인 재판관과 검사들도 감탄했다고 한다.


죽음을 며칠 앞두고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내 시신을 국내로 옮기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리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을 했다. 모진 고문과 여러 차례의 재판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10시 뤼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다.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며 안중근 의사가 밝힌 내용입니다.
1. 한국의 민황후(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정미 7늑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 천황 폐하(명치왕)의 아버지 태황제(효명왕)를 죽인 죄이다.


안중근 의사는 평화를 깬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평화 마저 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안 의사를 한 때 천주교에서는 살인을 했다 하여 범죄자 취급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중근 의사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는 대한민국 국민 중에는 없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일본인들도 안 의사를 존경하고 있으며, 한 일본인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한국으로 와서 하루 8시간씩 도보 행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를 지적하면서 고칠 것을 요구해 나설 때 이를 비난하는 이들이 한 목소리로 내던 주장이 있었습니다. “공의를 외친답시고 화평을 깨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와 같은 성경말씀으로 우리가 잘못하고 있음을 알리려는 분도 많았습니다.


오늘 안중근 의사의 서거 100 주년을 맞으며 이 문제를 다시 돌아 보게 됩니다. “시끄럽지 않은 상태”가 화평으로 위장되어 자주 우리를 현혹시킨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화평” 그 자체는 우리에게 있어 최종 목표가 아니라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같은 분이 소란을 피우지 않고 모든 한국 백성이 일제에게 순종하여 시키는 대로 따랐다면 한반도는 훨씬 문제도 적고 조용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화평이었을까요? 백보를 양보하여 그것이 화평이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 백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었을까요? 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특히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신학교가 폐쇄되고 성도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오늘날 누구도 이를 화평을 깨는 헛되고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잘못된 세상을 그대로 두어 화평케 하는 것이 아니라 검을 써서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러 주께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던 해에 한일합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전혀 헛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 백성이 그리고 해외동포들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안 의사와 같은 선열이 화평을 깨고 공의를 세우려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PS: The above article was sent by some one in Los Angeles, while I was in out of town on 3/26/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