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과 거룩한 땅
출3:5절

세실 리처드슨 대령은 미국 공군에서 군목으로 복무하다가 퇴역한 사람이다. 언젠가 그가 워싱턴 D.C.에 주둔하고 있을 떄, 우리 자 교회의 남선교회 헌신예배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대령이었던 그는 통수체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성령님이 행군 명령이 떨어지면 곧장 거수경례를 한 뒤 그 명령을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 아침에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새벽 5시 반에 잠이 깬 그는 느닷없이 새 안경을 맞추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아내가 새로 안경을 맞추라고 권했어도 들은 척만 척했던 그인데, 이상하게 그날은 새벽부터 다짜고짜 그런 생각이든 것이다. 물론 문제는 그런 이른 시간에 문을 여는 안경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리처드슨 대령은 데니스 식당으로 가서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한 뒤에 근처의 안경원이 문을 열자마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가, 왠지 매장에 있는 주인 여자에게 자신이 군목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야할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군인 할인을 받으려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자 그는 성령의 명령에 거수경례를 하고서 짧게 "저는 군목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말은 듣는 순간 그 여인이 보인 반응이었다. 금세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 남편도 군인인데 지금 해외 파병을 받아 외국에서 복무하고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제가 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도무지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어제 친구랑 같이 군목이신 분을 보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여기 이렇게 오셨네요"

이럴 때 우리는 소름이 돋는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 삶의 세세한 것까지 얼마나 자상하게 챙겨주시는가를 새삼 깨달으며 뭉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걸 알고 신발을 벗게 된다.

그 장소
양치기를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서 양을 치는 일처럼 단조롭고 지루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 모세는 그 일을 40년 동안이나 했다. 아마 하나님이 자신을 목초지로 쫓아버렸다고 느꼈을 것이다. 한때는 노예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를 꿈꾸었건만, 애굽인 노예 감독을 쳐 죽인 뒤에 그 꿈은 물거품이 되어 오히려 자신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후 40년간을 모세는 사막 한 구석에서 영적 망명자로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 사이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그 날 아침에 잠에서 깬 모세는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손에 들고서 오늘도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그저 여느 날과 똑같은 하루가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마라. 하나님이 어느 순간,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서 역사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유대인 학자들은 하나님이 왜 하필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셨는가를 논란거리로 삼아왔다. 천둥이나 번개를 보내셨다면 모세의 시선을 끌기에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게다가 하필 왜 인적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나타나셨을까? 애굽의 궁전이나 피라미드가 더 좋지 않았을까?
학자들은 마침내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한 군대도 없다는 것, 심지어 사막의 한 구석에 있는 떨기나무 사이에도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그 장소'라는 이름을 붙여 드렸다. 나는 그 이름이 정말 마음에 든다. 하나님은 여기든 저기든 어느 곳에나 계신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 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우리를 만나주실 것이다.

몇 해 전에 켄 카웁이라는 사람의 기도 간증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여태껏 들은 것 중에 가장 놀랍고도 신기한 간증이었다. 가족을 차에 태우고 오하이오 주 데이톤 부근의 I-75 고속도로를 달리던 켄은 한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 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차에서 내린 아내와 아이들은 곧바로 식당에 들어갔고 그는 다리 운동을 조금 하다가 주유소 앞을 지나서 식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옆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지나도 그치지 않고 계속 울리는 것을 본 켄은 응급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라고 응답을 했다. 그러자 '케 가웁 씨에게 온 장거리 전화입니다'라는 전화 교환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켄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지금 절 놀리시는 겁니까? 나는 그냥 여기를 걸어가다가 이 전화가 울려서 받은 것 뿐이라고요’
그 말에 어리둥절해진 전화 교환원은 '캔 가웁 씨가 거기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었고, 켄은 혹시 주변에 몰래 카메라가 숨겨진 건 아닌지 확인한 후 '제가 켄 가웁이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수화기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웁 씨, 저는 펜실베니아 주 해리스버그에 사는 밀리라는 여성입니다. 저를 모르시겠지만 가웁 씨의 도움이 필요해서 전화를 드렸어요’
밀리는 자신이 유서를 쓰고 자살하려고 했지만 죽기 전에 한번더 기도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하나님, 저는 진짜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텔레비전에서 켄 가웁이라는 상담가를 본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분과 이야기를 한다면 그 분은 분명 나를 도와 줄 수 있을가야'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구글이 생겨나기 전이었고 켄 가웁의 소재를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밀리는 계쏙 기도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 어떤 전화번호가 떠올라서 즉시 그 번호를 종이에 적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게 가웁 씨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거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밀리는 켄에게 "결국은 이 번호로 전화를 한번 해보자고 시도했지만, 진짜로 교환원이 가웁 씨를 바꿔준다고 했을 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켄을 향해 "지금 상담 사무실에 계신가요?"라고 물었다. 켄이 아니라고 하자 밀리는 놀란 듯이 소리를 지르며 "그럼 어디 계세요?"라고 재차 물었다. 그 말에 켄은 "지금 당신이 저한테 전화 한 거잖아요"라고 하자 "저는 제가 어느 지역에 전화하는 건지도 몰랐어요. 그냥 종이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한 거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켄이 밀리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지금 오하이오 주 데이톤 도로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 안에 있어요“
"거기서 무얼 하시는데요?"라는 밀리의 질문에 켄은 "공중전화를 받고 있지요"라고 대꾸했다.
켄은 이 간증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공중전화 박스를 나오는 순간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들 한 사람 한사람을 얼마나 세심히 보살피시느냐는 생각에 전율이 일어났다. 대체 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일이란 말인가? 그 많은 전화번호와 그 많은 번호의 조합 속에서 전지전능한 하나님만이 바로 그 시각에 바로 그 공중전화 번호를 그 여인에게 알려 주실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이야기는 잡지에도 연재되었고, 그리고 2jesus.org라는 홈페이지에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각주를 달았다)

전화를 끊고 식당으로 들어간 켄은 가족들 곁에 앉아서도 여전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아내를 향해 말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계셔...

신을 벗으라
성경에 신을 벗으라는 이상한 명령이 딱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기 전에 하나님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고, 두 번째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불타는 떨기나무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다른 사람의 체험이나 영성에 기대어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신앙체험 자신의 간증이 필요하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요구하셨을까? 나는 신발을 벗는 행위가 겸손과 경배를 상징하는 것이라서 그런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즉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동시에 하나님과 모세, 하나님과 여호수아 사이에 있는 어떤 장애물도 제거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신발을 벗는 습관이 있다. 내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하다는 것과 글쓰기가 나의 신성한 사명임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알 고 있는 –너무 뻔해서 쉽게 지나치는- 사실 한 가지를 언급하고 마무리 하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의미한 게 아니었다. 그 당시 모세가 서 있었던 땅을 의미했다. 당신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곳에 이르기 전에도 그 분을 경배해야한다.
지금 이곳이 거룩한 땅이다. 지금 이 순간이 거룩한 순간이다.
바로 여기, 바로 지금
당신의 신발을 벗어라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이다.